위험성 평가 숫자가 낮게 나오면 오히려 의심해야 한다
이 글은 산업안전기사 자격을 보유하고 제조·건설·물류 등 다양한 업종 현장에서 10년 이상 안전관리 실무를 담당해온 필자의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위험성 평가 결과를 처음 받아서 펼쳐봤을 때 모든 항목이 1점이나 2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빈칸 없이 깔끔하게 채워져 있고 위험성 결정란에는 전부 '낮음'이라고 적혀 있다. 처음 이 서류를 받았을 때 나는 잘 관리된 사업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업장에서 3개월 후 협착 사고가 났다. 그때부터 낮은 점수가 가득한 위험성 평가 결과서를 보면 오히려 경계하게 됐다.

■ 위험성 평가 점수가 말해주는 것과 말해주지 않는 것
위험성 평가는 가능성(빈도)과 중대성(강도)을 조합해 위험성 수준을 수치화하는 도구다. 안전보건공단 위험성평가 지침에 따르면 평가 결과를 기반으로 허용 불가능한 위험에 대해 반드시 개선 조치를 취해야 한다.

위 도식이 핵심을 보여준다. 모든 항목 점수가 1~2점으로 나온 위험성 평가는 서류는 완성됐지만 현장은 오히려 위험하다는 신호일 수 있다. 점수가 다양하게 분포된 평가가 현장을 실제로 반영한 신뢰할 수 있는 평가다.
사업장에 위험 요인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기계가 돌아가고 화학물질이 있고 사람이 움직이는 곳에는 반드시 크고 작은 위험이 존재한다. 모든 항목이 낮은 점수라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한다. 현장을 직접 보지 않고 작성했거나, 위험을 의도적으로 낮게 평가했거나. 어느 쪽이든 실질적인 위험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 서류용 위험성 평가가 만들어지는 방식
현장에서 서류용 위험성 평가가 만들어지는 패턴을 나는 여러 번 목격했다. 가장 흔한 방식은 전년도 파일을 열어서 날짜만 바꾸는 것이다. 공정이 바뀌지 않았고 설비도 그대로니까 내용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이 방식으로 만들어진 위험성 평가는 현장과 무관한 서류가 된다. 새로 도입된 설비의 위험도 없고 최근 아차사고에서 발견된 위험요인도 없다. 지난해와 똑같은 문서가 올해 현장을 대신한다.
두 번째 패턴은 담당자가 현장을 방문하지 않고 작성하는 경우다. 작업 표준서나 설비 도면을 보고 위험요인을 추정해서 작성한다. 문제는 실제 현장에서 작업자가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지, 어떤 우회 방법을 쓰는지, 어떤 구간이 실제로 아찔한지를 서류에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장을 모르면 위험을 모른다.
■ 진짜 위험성 평가와 서류용 위험성 평가의 차이

위 체크리스트는 내가 여러 사업장의 위험성 평가를 검토하면서 진짜와 서류용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사용해온 항목들이다.
진짜 위험성 평가의 첫 번째 특징은 현장 직접 방문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현장 사진이 첨부되어 있거나 특정 설비 번호나 위치가 명시되어 있으면 실제로 현장을 봤다는 증거다. 반면 추상적인 위험 설명만 있고 구체적인 위치 정보가 없으면 현장 방문 없이 작성됐을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특징은 점수 분포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진짜 현장 기반 평가에서는 낮은 위험도 있고 높은 위험도 있다. 같은 공정에서도 작업 단계별로 위험이 다르다. 모든 항목이 같은 수준의 점수라면 실사 없이 일괄 작성됐다는 신호다.
세 번째는 개선 조치가 구체적이다. 서류용 평가의 개선 조치란은 대부분 "안전 교육 실시" 혹은 "보호구 착용 지도"로 가득하다. 진짜 평가에서는 "3호 프레스 방호덮개 6월 15일까지 설치", "창고 입구 시야 확보를 위한 볼록 거울 설치" 같이 구체적인 대상과 기한이 명시된다.
■ 낮은 점수가 가져오는 실질적 위험
서류용 위험성 평가가 진짜 문제가 되는 것은 세 가지 이유에서다.
1) 위험을 발견하지 못해서 조치를 하지 않는다. 위험성 평가에서 낮게 나온 항목은 개선 대상이 되지 않는다. 서류에서는 안전한데 현장에서는 위험한 상태가 지속된다. 이것이 나중에 사고로 이어진다.
2) 감독이나 컨설팅에서 허점이 드러난다. 고용노동부 감독관이나 안전보건공단 컨설턴트는 위험성 평가 결과가 현장과 일치하는지를 현장 확인을 통해 검토한다. 서류에는 위험이 없는데 현장에 방호장치가 없는 개구부가 있으면 즉시 지적 사항이 된다.
3) 사고 발생 시 면피가 되지 않는다. 위험성 평가를 했다는 사실보다 제대로 했는지가 중요하다. 사고가 난 위험요인이 평가에서 누락됐거나 낮게 평가됐다면 위험성 평가를 했더라도 법적 의무를 성실히 이행했다고 보기 어렵다.
■ 위험성 평가를 실질화하는 3가지 원칙
10년 동안 여러 사업장의 위험성 평가를 개선하면서 효과를 확인한 원칙들이다.
1) 근로자 인터뷰를 평가 과정에 반드시 포함한다. 해당 작업을 직접 하는 근로자에게 "이 작업에서 가장 아찔했던 순간이 언제예요?"라고 물으면 서류에서 찾을 수 없는 위험요인이 나온다. 이 인터뷰 내용을 위험성 평가에 반영하면 현장 기반 평가가 된다.
2) 아차사고 보고와 위험성 평가를 연동한다. 아차사고가 보고됐을 때 그 공정의 위험성 평가를 즉시 검토하고 해당 위험요인이 평가에 반영되어 있는지 확인한다. 반영되어 있지 않다면 수시 평가를 실시한다. 이 루틴이 자리 잡히면 위험성 평가가 살아있는 문서가 된다.
3) 개선 조치를 기한과 담당자 중심으로 작성한다. "교육 실시"가 아니라 "누가, 언제까지, 무엇을 한다"는 형태로 작성한다. 이 방식으로 작성된 개선 조치는 이행 여부를 추적할 수 있고 책임 소재가 명확해진다.
■ 마치며 — 점수가 낮을수록 더 꼼꼼히 봐야 한다
위험성 평가 결과서를 받았을 때 모든 항목이 낮은 점수라면 그 사업장이 안전하다고 안심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높은 점수가 여러 항목에 나타나더라도 그 위험들이 실제로 개선되고 있다면 그 사업장이 더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위험성 평가의 목적은 낮은 점수를 받는 것이 아니다. 현장의 위험을 발굴하고 줄이는 것이다. 그 목적을 기억하고 있는 사업장의 위험성 평가와 그렇지 않은 사업장의 위험성 평가는 서류만 봐도 다르다. 그 차이를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지는 것이 안전관리자의 핵심 역량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