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안전

안전관리자가 경영진을 설득할 때 쓰는 말 vs 안 쓰는 말

New_World_Magazine 2026. 4. 28. 19:36

2016년 겨울이었다. 경기도 수원의 한 전자부품 공장. 설비 방호장치 설치 예산 120만원을 받아야 했다.

공장장 앞에 앉아서 이렇게 말했다.

"사고 나면 어떻게 하려고요."

공장장이 잠깐 나를 봤다. 그러더니 말했다. "알겠어요. 다음에 얘기해요." 회의는 5분 만에 끝났다. 예산은 안 나왔다.

그로부터 3개월 후 같은 설비에서 끼임 사고가 났다. 작업자 손가락 두 마디. 그때서야 예산이 나왔다. 400만원이.

그날 이후로 나는 경영진한테 다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안전관리자가 경영진을 설득할 때 쓰는 말 vs 안 쓰는 말

■ 10년 동안 안 먹힌 말들

솔직히 다 써봤다. 효과가 없었던 말들부터 정리한다.

경영진 설득할때 안쓰는말

위 비교 카드의 왼쪽이 내가 10년 동안 쓰다가 포기한 표현들이다. 왜 안 먹히는지 하나씩 말한다.

  1. "사고 나면 어떻게 하려고요." 이게 안 먹히는 이유는 경영진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 나면 안 좋다는 걸 모르는 경영진은 없다. 근데 그게 지금 당장 결재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감정을 건드리는 말은 단기 충격은 있는데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2. "법적으로 의무사항입니다." 이 말에 경영진이 보이는 반응이 있다. "그러면 최소한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법령을 들이대면 방어적이 된다. 방어적이 된 사람은 최소한을 찾는다. 설득이 아니라 협상이 된다.
  3. "위험요인이 많습니다." 추상적인 말이다. '많다'가 얼마나 많다는 건지 경영진은 모른다. 결정을 내리려면 구체적인 숫자가 있어야 한다. 숫자 없는 보고는 판단 기준이 없는 보고다.
  4. "안전이 중요합니다." 이건 대화를 끝내는 말이다. 안전이 중요하다는 걸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말은 할 말이 없다는 신호로 들린다.
  5. "근로자들이 힘들어합니다." 복지 얘기로 들린다. 안전 예산을 따내는 언어가 아니다. 경영진은 이 말에서 안전 투자의 필요성을 읽지 못한다.

■ 바꾸고 나서 실제로 먹힌 말들

같은 내용인데 말을 바꾸니까 달라졌다. 핵심은 하나다. 경영진의 언어로 말하는 것. 경영진은 돈과 리스크로 생각한다. 그 언어를 쓰면 된다.

  1. "이 위험 방치 시 예상 손실 8천만원입니다." 고용노동부 산업재해 현황분석에서 업종별 재해 손실 비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걸 우리 현장 규모에 맞게 환산하면 구체적인 숫자가 나온다. "사고 나면 어떻게요"보다 "예상 손실 8천만원"이 100배 설득력 있다.
  2. "감독 지적 시 과태료 500만원입니다." 처벌 리스크를 수치로 말한다. 경영진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숫자 중 하나다. 법령에 명시된 수치이기 때문에 반박하기 어렵다.
  3. "3공정 끼임 위험, 월 2건 아차사고 발생 중." 추상적인 위험이 아니라 구체적인 공정, 구체적인 건수다. 경영진이 어디서 뭐가 문제인지 3초 안에 파악할 수 있다.
  4. "120만원 투자로 8천만원 손실 예방 가능." 투자 대비 효과 공식이다. 비용 120만원을 쓰는 것이 아니라 8천만원 손실을 막는 것이라는 프레임이 바뀐다.
  5. "같은 재해 반복 시 보험료 30% 인상됩니다." 산재보험료 인상은 실제 경영 비용이다. 경영진이 직접 체감하는 숫자다. 이걸 말하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 상황별로 실제로 쓰는 멘트

 

위 카드가 4가지 상황에서 내가 실제로 쓰는 표현들이다. 공통된 패턴이 있다.

문제 + 수치 + 기한.

이 세 가지가 같이 들어가면 경영진이 결정할 수 있는 보고가 된다. 어디가 문제인지, 얼마나 심각한지,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이 세 가지가 없으면 경영진은 "검토해볼게요"로 끝낸다.

  1. 예산 요청할 때. "3공정 프레스 방호장치 미설치 상태입니다. 유사 사고 시 평균 치료비 800만원, 생산 차질 포함 총 손실 추정 8천만원입니다. 방호장치 설치 비용 120만원, 2주 내 완료 가능합니다. 결재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끝내면 경영진이 해야 할 일이 명확하다.
  2. 감독 대비 설명할 때. 감독이 예정되어 있거나 실시간으로 진행 중일 때 경영진한테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동일 위반 사항 1차 과태료 500만원, 재발 시 가중됩니다. 오늘 조치 가능한 사항 먼저 처리하겠습니다." 처벌 수치와 즉시 대응 의지를 동시에 전달한다.
  3. 위험 보고할 때. "3공정 아차사고 이번 달 2건 발생했습니다. 이달 내 설비 개선 조치가 필요합니다." 건수와 기한을 함께 말한다. 건수만 말하면 "그래서 어떻게 하라고요"가 돌아온다. 기한이 있어야 결정이 난다.
  4. 개선 효과 보고할 때. 이건 예산을 따낸 후 효과를 보고하는 상황이다. "방호장치 설치 후 해당 공정 아차사고 3개월째 0건입니다." 전후 비교 데이터를 말한다. 이 보고가 다음 예산 결재를 쉽게 만든다. 경영진이 투자 효과를 눈으로 확인하면 다음번 요청이 훨씬 빨리 통과된다.

설득의 타이밍도 기술이다

말만 바꿔서 되는 게 아니다. 언제 말하느냐도 중요하다.

  1. 비슷한 업종 사고 뉴스가 났을 때 바로 들어간다. "어제 뉴스에서 나온 협착사고, 우리 현장에도 같은 위험이 있습니다." 경영진이 외부 사례에서 위험을 인식하는 순간 수용도가 올라간다. 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2. 예산 편성 시즌 1~2개월 전에 말한다. 연말에 예산을 요청하면 내년으로 넘어간다. 예산 편성 시즌이 언제인지 파악하고 그 전에 요청해야 반영된다.
  3. 개선 효과를 보고한 직후에 다음 요청을 한다. 효과 보고 직후가 경영진 수용도가 가장 높은 시점이다. "이번 투자 효과가 이렇게 나왔습니다. 다음 분기에 추가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순서로 가면 거절이 줄어든다.

■ "사고 나면 어떻게요"는 10년 동안 한 번도 안 먹혔다 — 그래서 지금은 절대 안 한다

솔직히 말하면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고 나면 정말 어떻게 하려는 건지 물어보고 싶은 순간이 지금도 있다.

근데 그 말로는 예산이 안 나온다. 10년 동안 한 번도 안 나왔다.

경영진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 말이 그들의 언어가 아니어서다. 경영진은 숫자로 생각하고 숫자로 결정한다. 안전관리자가 그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아무리 맞는 말을 해도 전달이 안 된다.

그래서 지금도 경영진한테 보고하러 가기 전에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말 안에 숫자가 있는가. 기한이 있는가. 그게 없으면 다시 쓴다. 경영진이 결정할 수 있는 보고를 들고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