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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안전

보호구를 가장 잘 지급하는 회사가 착용률이 낮은 이유

by New_World_Magazine 2026. 5. 3.

2018년 여름이었다. 경기도 평택의 한 화학 공장. 안전관리자로 부임한 첫 주에 보호구 보급 상황을 점검했다.

완벽했다.

안전모, 안전화, 보안경, 귀마개, 안전장갑. 전 직원 100% 지급. 지급 대장에는 전원 서명이 찍혀 있었다. 보호구함도 정리되어 있었고, 연 2회 교체 계획도 있었다. 보호구 예산도 넉넉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현장을 돌아다니는데 보안경을 쓴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귀마개도 마찬가지였다. 안전장갑을 낀 사람은 절반 정도였다.

2주 후 정식으로 착용률을 조사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보호구를 가장 잘 지급하는 회사가 착용률이 낮은 이유
보호구 지급 현황과 실제 착용률

위 표가 그 공장의 보호구별 실제 착용률이다. 지급률은 100%인데 평균 착용률은 65%였다. 35%의 격차.

가장 심각했던 건 보안경과 귀마개였다. 둘 다 100% 지급했는데 착용률은 42%와 38%. 절반 이상이 안 쓰고 있었다.


■ 지급 대장에는 전원 서명이 있었다

보호구 지급 기록을 다시 봤다. 분기마다 새 보호구를 지급하고 있었다. 작업자 전원이 서명했다. 반품도 없었다. 불만 접수도 없었다.

근데 왜 안 쓰나.

작업자 몇 명한테 물어봤다. "보안경 왜 안 써요?" 대답이 돌아왔다.

"시야가 가려서요. 작업하기 불편해요."

"불편하면 말하면 되잖아요."

"말해봤자 안 바뀌잖아요."

그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지난 2년간 보호구 개선 요청이 접수된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요청은 있었는데 검토된 적이 없었다.


■ 관리자가 고른 보호구, 작업자는 불편했다

보호구 구매 과정을 확인했다. 전부 관리자가 정했다. 카탈로그를 보고, 가격을 비교하고, "이게 좋아 보이는데요"로 결정했다.

작업자한테 물어본 적이 없었다. "이 보안경 괜찮아요?" "이 귀마개 불편하지 않아요?" 이런 질문 자체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관리자가 보기에 좋은 보호구를 샀다. 작업자가 실제로 쓰기 편한 보호구를 산 게 아니라.

보안경이 그랬다. 관리자가 고른 건 안전성이 높은 고글형이었다. 근데 작업자 입장에서는 시야가 좁았다. 특히 세밀한 조립 작업을 하는 사람한테는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안 썼다.

귀마개도 마찬가지였다. 차음 성능이 좋은 폼형을 샀다. 근데 작업자들은 동료와 대화가 안 되니까 뺐다. 작업 지시를 못 듣는 게 더 위험하다고 느꼈다.


■ 착용률이 낮은 진짜 이유

보호구 착용률이 낮은 5가지 원인

위 5가지가 내가 분석한 착용률 저하 원인이다. 하나씩 설명한다.

1) 작업자 의견 반영 없이 구매. 이게 가장 큰 원인이었다. 보호구 선정 과정에 작업자가 없었다. 관리자 혼자 카탈로그 보고 정했다. 그러니까 실제로 쓸 사람이 불편하다고 느끼는 제품이 들어온 거다.

2개월 후 실험을 했다. 보안경 3종을 샘플로 받아서 작업자 10명한테 일주일씩 써보게 했다. 그리고 투표했다. 관리자가 고른 제품은 10명 중 1명만 선택했다. 나머지 9명은 다른 제품을 골랐다.

2) 착용 교육 없이 지급만. 보호구를 받으면 보호구함에 넣어두고 끝이었다. 왜 써야 하는지, 어떻게 쓰는지, 언제 쓰는지. 설명이 없었다.

귀마개가 특히 그랬다. 폼형 귀마개는 제대로 삽입하는 방법이 있다. 손으로 비벼서 가늘게 만들고, 귀를 당겨서 귀도를 펴고, 삽입 후 팽창을 기다려야 한다. 이걸 아는 작업자가 거의 없었다. 그냥 쑤셔 넣고 "안 맞아요"라고 했다.

3) 미착용 단속 없음. 착용하지 않아도 지적받지 않았다. 관리감독자가 현장 순회를 하는데 보안경을 안 쓴 사람을 봐도 그냥 지나쳤다. 몇 번 지적했는데 계속 안 쓰니까 포기한 거였다.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사업주는 근로자에게 보호구 착용을 의무화해야 한다. 근데 의무만 있고 단속이 없으면 착용률은 안 올라간다.

4) 관리감독자가 먼저 안 씀. 이게 결정적이었다. 관리감독자가 현장에 들어갈 때 보안경을 안 쓰고 들어갔다. "나는 잠깐만 있으니까." 작업자가 그걸 봤다. 관리자도 안 쓰는데 왜 나만 써야 하나.

문화는 위에서 만들어진다. 관리자가 쓰지 않으면 작업자도 쓰지 않는다.

5) 불편함 개선 시스템 부재. "이 보호구 불편해요"라고 말해도 바뀌지 않았다. 대안 제품을 검토하는 프로세스가 없었다. 그러니까 작업자는 말하기를 포기했다. 불편하면 그냥 안 쓰는 걸로 해결했다.


■ 3개월 만에 착용률 85%로 올린 방법

문제를 찾았으니 바꿨다. 3개월 목표로 착용률 개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단계 — 작업자 의견 수렴. 보안경, 귀마개, 안전장갑. 이 3개 보호구에 대해 작업자 전원 설문조사를 했다. "어떤 점이 불편한가요?" 54개 응답이 나왔다.

가장 많았던 불편 사항: 보안경 김 서림(23건), 귀마개 의사소통 방해(18건), 안전장갑 정밀작업 불가(13건).

2단계 — 대안 제품 테스트. 불편 사항별로 대안 제품을 찾았다. 김 서림 방지 코팅 보안경, 차음 레벨이 낮은 귀마개, 손끝 감각이 살아있는 얇은 장갑. 샘플을 받아서 2주 동안 테스트했다.

작업자가 직접 써보고 평가했다. 투표로 제품을 정했다.

3단계 — 착용 교육 실시. 새 보호구를 지급하면서 30분 교육을 했다. 귀마개 올바른 착용법, 보안경 관리법, 장갑 사이즈 선택법. 관리감독자가 직접 시범을 보였다.

4단계 — 관리자부터 착용. 공장장한테 부탁했다. 현장 출입 시 보호구 완전 착용. 관리감독자 전원 동일 적용. 예외 없음.

첫 주는 어색했다. 2주 차부터 작업자 착용률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5단계 — 미착용자 개별 면담. 단속이 아니라 면담을 했다. "왜 안 쓰세요? 불편한 점이 있으세요?" 불편 사항을 듣고 대안을 찾아줬다. 강압이 아니라 문제 해결로 접근했다.

3개월 후 재조사했다. 평균 착용률 85%. 보안경 82%, 귀마개 78%, 안전장갑 91%.

지급률은 그대로 100%인데 착용률이 65%에서 85%로 올랐다. 20% 포인트 상승.


■ 지급이 아니라 착용이 목표다

그 경험 이후로 보호구 예산을 볼 때 기준이 바뀌었다.

"얼마나 많이 샀나"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쓰나."

보호구 1000개를 샀는데 500개만 쓰면 의미가 없다. 500개를 샀는데 500개를 다 쓰면 그게 더 효과적이다.

지급은 수단이다. 착용이 목표다. 이 목표를 놓치면 아무리 많이 지급해도 현장은 안 바뀐다.

그래서 지금도 보호구를 살 때는 작업자한테 먼저 묻는다. "이거 써보니까 어때요?" 그 답을 들어야 다음 구매를 한다. 관리자가 좋아 보이는 게 아니라 작업자가 쓰기 편한 걸 사야 한다.

틀릴 수도 있다. 모든 현장이 그런 건 아닐 수도 있다. 근데 적어도 내가 본 그 현장에서는 그랬다. 그래서 지금도 보호구 착용률이 낮은 현장을 보면 제일 먼저 묻는다. "작업자한테 물어봤어요?"